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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활웅자료실] <칼럼> 정체성의 충돌

저자
이활웅
출처
통일뉴스
발행일
2004-09-24
<칼럼> 정체성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교수는 냉전이후 세계정세의 흐름을 “문명의 충돌”로 조망했는데 한국의 최근 정치정세는 가히 “정체성의 충돌”이라 할만하다. 충돌의 포문은 먼저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가 열었다. 그는 과거사 규명, 친일행위자처벌법 개정 및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 그 정체성을 밝히라고 따지고 든 것이다.

정체성 짓밟은 게 다름아닌 5.16 군사반란

그리고 약 1,500명의 소위 “보수원로”들(한국은 세계최다 원로보유국?)이 이에 가세하여, 대통령과 집권당을 친북, 좌경, 반미세력으로 규탄하면서, 친일청산, 국보법폐지, 의문사진상규명 등을 중지할 것과 아울러 민족공조가 아니라 한미공조를 강화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파기하라고 요구했다. 또 경제는 “좌파적 가치”의 덫에 걸려 성장잠재력을 상실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별도의 결의문으로 노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것과 국보법폐지반대를 위해 모든 국민들이 총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의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 박 대표나 소위 “보수원로”들이 생각하는 국가정체성의 근본은 무엇보다도 철저한 반북과 친미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친일세력과 군사독재세력을 비호하고 재벌과 특권층을 보호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존재이유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헌법 전문은 먼저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대한민국의 사명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민족의 단결, 사회적 폐습과 불의의 타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 각인의 기회균등, 최고도의 능력발휘, 자유와 권리에 따른 책임완수,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의 기여, 안전과 자유와 행복의 확보 등을 나라의 목표로 열거하고 있다. 또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못박고 있다.

보안법은 “없어도 되는 불필요한 법”이 아니라 “반드시 없애야만 하는 악법”

이러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 박정희, 김종필 등 일당이 일으킨 1961년의 5.16 군사반란이었다. 그로부터 32년 간 계속된 군인만능시대는 헌법이 대한민국의 사명으로 밝힌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또 군사독재체제를 깔아 국민을 누르고, 남북분단을 고정화시키고, 사회적 부조리와 만성적 부패를 부추기고, 지역차별과 계층간 갈등을 조장하고, 빈부격차와 정경유착을 만연시키고, 숭미사대의 악습을 이 땅에 고착시켰다.

한나라당은 이러한 군사독재체제의 맥을 이은 정당이며 박근혜 대표는 바로 5.16 군사반란의 수괴 박정희의 여식이다. 그러한 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을 지탄하면서 헌법을 지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으며 헌법을 지키지 못하면 대한민국이란 간판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의 양식과 양심을 모두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헌법을 그토록 존중하는 것이 박 대표의 소신이라면 먼저 그의 아비가 한 일이 헌법을 지킨 일이었는지, 그리고 18년간 그의 아비가 누린 절대적 권력이 과연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인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국민 앞에 솔직히 밝히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또 그토록 많은 소위 “보수원로”들 중 약 500명은 퇴역군인들이며 그 외에 총리, 장관, 국회의원, 혹은 각 분야의 요직을 역임했다는 인사들도 대부분 5.16군사반란에 가담했거나,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나중에 변절하고 동조한 군인 출신들이거나, 아니면 양심을 팔거나 외면하고 군부독재체제에 아부한 자들이다. 그들은 저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원로들이라고 자부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란 모든 이념과 사상을, 심지어 공산주의까지 포함해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믿고 표시하고 주장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제도라는 것도 모르는 자들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국가보안법이 마치 국가의 기본법인양 이 법이 없어지면 대한민국이 당장 망한다는 식의 주장은 너무나 황당하다. 보안법은 정적을 탄압하고 국민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지고 그렇게 사용된 반민주적 악법이다. 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법이 아니라 그것을 죽이는 법이다. 보안법은 또 남북화해와 민족통일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반민족적 악법이다. 사법부의 엘리트들이 보안법의 존치를 두둔했다지만 이는 과거 양심을 굽히고 독재의 시녀가 되어 애매한 사람들을 보안법으로 단죄하면서 출세했던 그들의 치부를 가리려는 또 하나의 비(非)양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보안법은 단순히 “없어도 되는 불필요한 법”이 아니라 국가발전과 국민의 행복을 저해하는 “반드시 없애야만 하는 악법”이다. 대체입법이나 형법보완은 필요 없으며 보안법만 그냥 없애버리면 되는 것이다.

북한 실체 인정하는 게 국가정체성 혼란을 불식하는 것

그러나 이 기회에 헌법 자체 속에 내재하는 정체성 충돌의 요소를 짚어볼 필요는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헌법전문은 평화적 통일을 사명이라 밝히고 있다. 그리고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분단국가란 엄연한 현실에서 나온 당연한 규정이다. 그러나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는 대한민국이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헌법 전문의 정신과 제 4조의 규정에 모순된다.

이 모순에서 파생한 것이 1) 북한정권의 존재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 또는 무시하거나, 2) 북한정권을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거나, 또는 3)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강변하는 등의 비현실적이며 무리한 이론들이다. 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생긴 것이 국가보안법이며 무조건적인 반북사상이며 대북 주적 개념이며 6.15 공동선언 위헌설이다.

헌법이 평화적 통일을 우리의 사명이라 밝힌 것은 너무나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남과 북에 두 개의 분단정부가 존재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고는 평화적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헌법 제3조를 현실에 맞게 수정하고 북한의 실체를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국가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불식하고 평화통일의 사명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첩경이라고 생각된다.

1949년 5월 23일 공포된 서독 헌법에는 모든 독일인들에게 독일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을 촉구하는 “통일조항”이 있었는데,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1956년 8월 16일 이 “통일조항”은 모든 국가기관이 통독의 실현을 법적으로나 사실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독일이 우리보다 빨리 통일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독일이 통일 된지도 벌써 14년이 되는데 우리는 아직도 정체성 시비로 들끓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4년 9월 24일자 통일뉴스 칼럼입니다)
작성일:2020-10-13 10:09:32 112.160.1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