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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활웅자료실] <칼럼>노인들의 성숙한 판단을 바라며

저자
이활웅
출처
통일뉴스
발행일
2004-04-08
<칼럼>노인들의 성숙한 판단을 바라며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지난 3월 26일 선거유세도중 젊은이들과 대담하면서 "미래는 20, 30대의 무대이므로 여러분들은 오늘의 결정에 이해관계가 있지만 노인층은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분들이기 때문에 투표를 안 해도 괜찮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여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 나라를 누가 만들었는데 그런 소리하느냐?", "누가 전쟁에서 피 흘리고 허리띠 졸라매고 일해서 이 만큼 살게 됐는데 그런 소리하느냐?", 또는 "투표는 국민의 신성한 의무이자 권리인데 투표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망발이냐?"고 노인들은 노발대발하고 있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에게 쏠리던 총선민심이 흔들리고 있으며 정 의장도 노인단체들을 찾아다니며 무릎꿇고 해명하고 사과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한다.

정 의장의 발언이 정치지도자로서 망발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선거의 판세가 크게 영향 받는다면 그것은 한국의 정지의식 수준이 아직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 의장의 발언취지는 종래 투표성향이 낮았던 젊은층의 투표참여를 권장하고 독려하기 위란 것이었지, 의도적으로 노인층의 공로를 부정하거나 그들의 가치를 폄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그는 노인들은 "투표를 안 해도 괜찮다"고 했지 "투표하지 말라"고 하지는 안았다. 그것을 두고 노인들이 국민의 권리인 투표를 "하지 말라"고 했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과잉반응이라고 생각된다.

또 노인들의 불편한 심기에 편승하여 정 의장의 실언을 마치 이번 선거의 큰 이슈나 되는 양 부풀린 것은 야당의 악의적이며 치졸한 정치공세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수 십년 동안 독재와 부패의 온상 속에서 비대해진 한국의 퇴폐적인 기존 정치세력이 노무현정부 출범이후 새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가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와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기사회생의 최후수단으로 밀어붙인 것이 지난 3월 12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야합으로 가결된 대통령 탄핵소추결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에 선거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 중앙선거위원회의 판단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대통령을 파면할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절대다수 국민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국민은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를 정치와 민생의 안정을 전혀 무시한 야당의 비이성적 폭거로 규정하고 거센 반발을 보였다. 이에 당황한 야당 의원들이 때 마침 정 의장의 실언이 튀어나오자 물실호기라고 그 꼬투리를 잡고 선거의 판세를 저들에게 유리하게 전환시켜 보려고 이를 최대한 이용하여 노인들의 분노에 불을 지르고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정 의장을 위시한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늘 언동에 신중을 기하도록 세련돼야 하고 수양을 높여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 기회에 노인들도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반추해야 할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선 한국의 노인층은 전통적으로 지나치게 보수, 수구적이어서 나라와 민족의 역사발전의 발목을 잡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왕조의 불합리한 봉건적 신분제도는 보수, 수구의 힘으로 5백년이나 유지되면서 우리 민족이 세계적인 근대화추세에 뒤지는 원인이 되었다. 1853년 쇄국을 버리고 문호를 연 일본은 불과 23년 후에는 근대국가의 틀을 갖추고 우리에게 개항을 강요하는 새 강국으로 탈바꿈했는데, 우리는 1876년 개항 후 30년이 지난 후에도 필요한 개혁과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고루한 노인들의 보수, 수구 성향이 젊은이들의 개화, 개혁 움직임에 지나친 제동을 건 결과이었다.

한국의 노인층은 또 생리적으로 지나치게 사대주의적이다. 우리는 그 옛날에는 몇 백년동안 중국에 사대했고, 20세기 초반 40년은 일본에 사대했으며, 그 후 지금까지 50년은 미국에 사대하고 있다. 미국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무슨 큰 일이나 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 한국의 노인층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또 하나의 문제로 한국의 노인들은 미국이 달가워하지 않는 남북 화해와 통일을 추구하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큰 잘못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군을 무기한 붙들어 두기를 원하며, 6.15 남북공동선언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며 남북화해와 경제협력의 추진을 무의미한 일방적 '퍼주기'라고 비난한다.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를 훔치려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행적이나 그로 인해 입은 민족사의 큰 상처로부터는 아무런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고, 그저 한미동맹을 신주처럼 모시며, 동족인 북한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 한국 노인들의 고질적 습성이다.

한국 여성들을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고 갔던 일본정부의 야만과 무책임 그리고 무성의에 대해 개탄하고 비난하면서도, 일제 강점 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사실조사에는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한국 노인층의 모순된 자세이다.

그리고 자기자식의 병역의무는 이 핑계계로 기피시키면서, 남의 자식은 사지로 몰아가는 이라크 파병을 응당 그리고 신속히 실행해야 한다고 핏대를 올린 것이 한국의 보수, 수구적인 노인층이 아니었던가?

이 나라를 이만큼 살게 했다는 노인들의 자부심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 있으며, 이 나라에는 온갖 부정과 부조리가 판을 치고 있다. 이 나라를 가리켜 '총체적 부패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노인들은 잘 된 일에 대한 자부심에 곁들여 잘못된 점에 대한 책임도 느끼고 반성도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잘 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젊은이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도 80이 다 돼 가는 노인이다. 보수적이며 수구적인 환경에서 자라고 배우고 살아왔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나를 무시하면 분하고 서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보면 내 생각이라고 다 옳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역시 젊은 사람들의 생각이 나보다 앞섰구나 하고 느끼는 때도 많다.

자동차에는 엔진도 있고 브레이크도 있다. 둘 다 필요한 장치이다. 젊은이들은 나라의 엔진이다. 그러나 그들이 막 가선 안되기 때문에 노인들이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는 브레이크의 과용으로 남에게 뒤진 역사이다. 특히 우리는 정치적으로 매우 뒤져 있다.

사실 정치적으로 성숙한 나라에서도 정동영 의장의 실언 같은 일이 발생하여 논란이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 그 때문에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좌우되는 일은 거의 없다.

4.15 총선은 한국의 정치발전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정치행사이다. 사안의 경중을 잘 가려서 그 큰 의의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젊은이나 노인층이나 모두 성숙한 판단을 하고 이에 따라 귀중한 한 표를 던져야 할 것이다.

(2004년 4월 8일자 통일뉴스 칼럼입니다)
작성일:2020-10-13 10:09:32 112.160.1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