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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활웅자료실] 한국외교의 숭미사대벽(崇美事大癖)

저자
이활웅
출처
통일뉴스
발행일
2004-01-16
한국외교의 숭미사대벽(崇美事大癖)


1950년대 외교, '미국이 손들면 우리도 손들자'

1955년, 5년 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외무부에 들어가서, 내가 첫째로 놀란 것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올리는 중요한 결재서류는 영문으로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미리 내용을 검토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서울주재 미국대사는 주로 이 대통령을 상대했으며 외무장관은 미국의 공사나 참사관의 상대역이었다. 새로 부임하는 외국대사를 공항에서 영접하는 것은 의전장이 할 일이었지만 미국대사가 오는 경우에는 외무장관이 나가는 것이 한국의 관례였다.

1958년에 나는 한국대표단의 말석에 끼어 어떤 국제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수석대표인 C씨와 차석대표인 P씨가 각 의제별로 우리 대표단이 취할 입장을 검토하고 나서, "미국 대표단의 동정을 주시하다가 그들이 손들면 우리도 손들도록 하자"고 결론짓는 것을 보고, 고소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당시의 한국은 나라자체가 미국의 후원으로 세워지고 또 그 힘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니 한국외교가 숭미사대 일변도로 치달은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점차로 하나의 습벽(習癖)으로 발전하여 "외교란 미국에 의존하면 되는 손쉬운 것"이라는 개념이 외교관들 뿐 아니라 정치인들이나 일반국민 사이에도 만연되어갔다.

그래서였는지 1961년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장군은, 미국 물을 먹어보고 외마디 영어라도 지껄일 수 있고 양식을 먹을 줄 알고 서양 춤이나 출 줄 안다는 군인들을 대거 외교관으로 기용했다. 그리고 출세제일주의에 눈먼 직업외교관들이 곧 이들 군 출신 친미외교관들의 수족 노릇을 해주면서 숭미사대는 한국외교에 있어서 하나의 금과옥조로 굳어져 갔다.

한국외교, 숭미사대적인 뿌리깊어

그런데 이번에 자주외교론과 숭미사대외교론 사이의 갈등으로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이 경질되었다. 이 인사의 내막과 진상이 다 밝혀지지 않은 지금 그 잘잘못을 시비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윤 장관이 이임사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미동맹을 통해 평화를 달성해 왔다"면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강조하는 한편, 대미의존 외교자세를 고집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자주외교방침을 폄하했다는 외교부직원들의 생각이 99% 옳은 것이었다고 강조했다는 사실은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한국의 숭미사대적인 안일무사 외교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가를 실감케 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미동맹을 통해 평화를 달성해 왔다"는 윤 장관의 한반도정세 판단은 그가 두둔한 숭미사대 외교노선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지난 50여 년 간의 한반도의 분단상태를 "평화가 달성된 상태"로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분단상태는 정상적인 상태이며 따라서 그대로 유지해야 할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이 상태를 만들어 내고 또 지탱해 오고 있는 힘의 주체인 미국에 대한 의존관계를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5년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분단상태는 그대로 유지돼야하는 정상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아니 되도록 속히, 통일된 상태로 바뀌어야 하는 비정상상태이다. 6.25 전쟁은 물론 남북 간의 모든 충돌과 갈등, 그리고 그에 따른 우리 민족의 온갖 고통과 고민은 모두 분단이라는 비정상 상태로 말미암은 것이며, 따라서 통일이 되기 전에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이런 상태를 "평화가 달성된 상태"로 보는 윤 장관의 현실인식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한반도의 현 상태는, 2차대전의 종료에 따라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이, 미국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남북으로 분열되고, 지난 수 백년 동안 우리 역사가 추구해 온 자주, 평등, 근대화 및 시민적 자유 등의 가치를 자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로 인한 모순을 타파하고자 반세기동안 몸부림치고 있는 상태이다. 이런 비정상적 상태를 하루라도 속히 정상적 상태로 회복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이다. 정치나 경제나 군사나 교육이나 모든 것이 다 그래야 하겠지만 특히 외교는 이 민족의 지상과제인 통일을 이루는데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분단을 질질 끄는 외교가 아니라 통일을 앞당기는 외교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통일외교는 미국의 입장과 상치될 수밖에 없어

통일을 위한 외교의 첫째 과제는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함으로써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한국군을 미군의 지휘체계에서 완전 독립시키는 일, 남북미 3자간의 군축을 실현시키는 일, 그리고 "북한을 적으로 삼는 미군"을 이 땅에서 내 보내는 일도 중요한 과제들이다. 또 지금 자칫 전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는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 북한에 대해서만 핵무기 개발계획의 포기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도 북한의 체제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주고 북의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제재조치를 조속히 해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통일외교는 미국의 입장과 상치되는 경우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반도분단의 장구화가 자국의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한국외교는 한반도의 통일이 미국의 이익과 상치되지 않으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이론과 방안을 모색하고 발전시켜야하며, 또 그런 방안을 미국이 납득하고 수락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모든 역량을 집중 발휘해야 한다. 그것은 꼭 반미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한국의 정당한 요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성실하게 이해와 지지를 촉구하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라크 파병문제만 해도 그렇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유엔의 승인 없이 감행됐다는 점, 이라크내의 반미폭동의 격화로 정세가 험악하다는 점, 우리 헌법이 침략적 전쟁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국내의 반대 여론이 거세다는 점을 들어 전투병 파병은 못하겠다고 조리있게 설명하고 딱 부러지게 거절하면 그만인 일을, 자주보다는 동맹이 살길이요 국익이라는 식의 구차한 구실을 만들어 파병을 결정함으로써 미국의 침략행위의 뒤를 닦아주는 추태를 연출하고 말았다.

외교는 한 나라나 민족이 정치, 경제, 군사, 사회, 기술,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의 그의 총 역량을 가장 효과적이며 집약적으로 경주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그의 위상을 되도록 많이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것은 자주만 가지고도 안되며 동맹만 쫓아서도 안 된다. 그것은 자주와 동맹을 균형 있게 양립시키며 조화시켜야하는 매우 정교한 예술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자주가 주(主)의 위치에 자리잡고 동맹은 종(從)의 위치에 서야하는 것이다.
작성일:2020-10-13 10:09:32 112.160.1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