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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식자료실] 정전협정의 한계와 그 대체 방안

저자
김남식
출처
통일연대
발행일
2003-03-14

정전협정의 한계와 그 대체 방안


김남식(통일뉴스 상임고문)

 

1. 머리말


올해는 정전협정 체결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간 반세기라는 세월은 국제사회는 물론 남과 북 사이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특히 6.25 한국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물론 정전협정 체결의 당사자간에도 근본적인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즉, 남한과 중국은 관계정상화가 된지 오래이며, 유엔군으로 참전한 16개국중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북한과 수교 및 관계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변화와 함께 정전협정도 체결 당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현실에 맞지도 않음은 물론이고 그간 정전협정을 유지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가 사실상 파기된지 오래이다.

그리고 정전협정에 규제된 내용, 특히 군사력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정전협정 체결 당시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군사전략들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반도의 정전협정은 분명히 냉전시대의 산물이며, 따라서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불합리한 협정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며 하루속히 파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50년전에 체결된 정전협정 문제를 어떠한 방도에서 접근하여 한반도에 평화상태를 달성하려 했는가를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늘날 거론되고 있는 북한이 제의한 불가침조약이 정전협정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정전협정과 정전상태


1) 정전협정

정전협정은 제5조 63항으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언
제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제2조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가 총칙
 나 군사정전위원회
  1. 구성
  2. 직책과 권한
 다. 중립국 감시위원단
  1. 구성
  2. 직책과 권한
  3. 총칙
제3조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제4조 쌍방 관계 정부들에의 건의
제5조 부칙

이러한 정전협정의 내용은 오늘날 제1조와 제2조만이 불안전한 상태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군사정전위원회의 경우 그 임무가 정전협정의 준수를 감시하며 정전협정의 위반사건이 발생하면 그를 협의하여 처리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실질적인 휴전관리기구라고 볼 수가 있는데, 이 기능이 사실상 파기된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1991년 3월25일 유엔사측의 수석대표로 한국군 장성 황원탁 소장(한미연합사령부 부참모장) 이 임명되자 이를 계기로 제460차 군정위 본회담부터 개최가 중단된 상태이다. 이는 북한측과 중국도 공히 정전협정 위반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 군사정전위원회는 열리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전위원회 본회담은 459차까지 열린 것으로 된다.

그후 1993년 4월3일 중립국 감독위원회 성원인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이 철수를 했는데, 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됐으며 분리됨으로 인하여 분리된 그들 나라들 간의 의견 불일치로 대표단 성원들을 철수시킨 것이다. 1995년 2월18일에 폴란드 대표단도 중립국 감독위원회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리하여 중립국 감시위원단은 국경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병력과 작전무기 군수물자 등에 대한 감독 감시 사찰 조사 등을 하여 그 결과를 군사정전위원회에 보고하는 본래의 임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임무는 이미 오래전인 1956년 6월9일부로 미국측의 강압에 의해 남과 북에서 각각 5개 지역에 파견된 감시소조들이 철수하게 됨으로서,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임무는 이때부터 정전협정에 규정된 대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태가 이러한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자 북한측은 1994년 5월24일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새로운 협상기구로서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1994년 9월2일 중국 대표단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의 철수를 공식 보도했다. 그것은 8월30일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북한 외교부 부부장 송호경은 중국측에 정전협정을 새로운 보장체제로 대체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으며 중국측은 군사정전위원회의 대표단을 철수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정전협정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위원회가 해체나 다름없는 상황에 이르자 북한에서는 1996년 2월22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북미 잠정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의했다.

그 내용은 `미국의 대조선 정책과 현 조미관계 수준을 고려하여 우리는 조선반도에서 무장충돌과 전쟁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라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면서 미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첫째, 북미간에 잠정협정을 체결하고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정전협정을 대신한다. 둘째, 잠정협정을 이행감독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할 북미공동 군사기구를 설치.운영한다. 셋째, 이러한 문제들을 토의하기 위하여 해당급에서 협상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잠정협정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관리, 무장충돌과 돌발사건 발생시 해결방도, 군사공동기구의 구성과 임무 및 권한, 잠정협정의 수정 보충 등 안전질서와 관련되는 문제들이 포함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북한측의 잠정협정 제의는 정전협정에 대한 사실상의 무효화이며 잠정협정을 통해 정전상태를 유지해 나가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북한의 잠정협정 제의에 대해 당일 미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한 북한의 어떠한 제안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53년에 맺은 정전협정이 그동안 한반도의 안정을 유지해 왔다...... 미국정부는 한국이 제외된 어떤 협정도 북한과 맺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정전상태를 유지 관리하기 위한 모든 장치들이 파기된 상태에서 미국이 잠정협정마저 거부하기에 이르자 북한의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는 `평화협정 조인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현 한반도정세는 우발적 무력충돌 위험을 방지하고 정전상태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합법적인 군사적 접촉창구 설치를 요구하면서 북미 장성급회담을 위한 실무협상 개최를 주장했다.

이렇게 북한이 제의한 장성급회담은 1996년 4월에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제주도)에서 제의한 4자회담에 관한 것이 크게 전면에 부각이 되고 그를 개최하기 위한 접촉과 회담들이 진행되고 4자회담의 예비회담을 거쳐 본회담 개최가 이루어져 오는 상황에서 북미 장성급회담은 뒷전에 밀렸는데 98년 6월8일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박인수 대좌와 유엔사 군정위 비서장 토머스 라일리 대령과 접촉을 갖고 장성급대화를 개최하는데 합의가 이뤄졌다.

장성급회담은 인민군 장성과 미군 소장, 한국군 준장, 영국군 준장, 제3국군 대령 등이 참가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러한 장성급회담에 합의를 봄으로서 정전협정의 실질적인 관리적 장치로서 그 임무와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장성급회담에 대한 북미간의 견해는 상반된 입장이다. 미국은 유엔사라는 틀속에서의 장성급회담으로, 북한은 유엔사가 아니라 북미간의 장성급회담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장성급회담은 10여차의 회담이 개최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정전협정은 체결당시에 규제된 63조 가운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 관리의 정도로만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나마 이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아니라 비상설적인 장성급회담으로 대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요컨대 정전협정은 반세기 동안 지나오는 과정에 그 내용이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으며 또한 새롭게 변화하는 군사적 상황들을 규제할만한 조항이 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정전협정을 실질적으로 관리 운용하는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위원회가 파기된 상태에서 장성급회담이라는 편법으로 그를 대체하고 있음으로 이미 정전협정은 사실상 새로운 장치로 대체되어야만 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2) 정전상태

정전협정 제4조 60항에서는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소집하고 한반도로부터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으로 이에 건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된 `쌍방`이라는 것은 북한과 중국을 일방으로, 미국을 타방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전협정 60항의 요구에 따라 1953년 10월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소집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는데 미국측(유엔사) 대표가 별다른 이유도 제기하지 않으면서 회담장에서 퇴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따라서 예비회담이 파탄되고 정치회의도 개최될 수가 없었다.

이는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3개월도 안되는 상황에서 미국측이 예비회담에서 중간에 탈퇴했다는 것은 정전협정을 사실상 처음부터 준수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가 있으며,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대 철거를 반대한 것과 다름없는 행위라고 볼 수가 있다.  

1954년 4월26일부터 제네바에서 남북한을 포함해 미국, 당시 소련, 중국 등 19개국이 참가해서 한반도문제를 토의했는데 이는 그 해 1월말경 베를린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프랑스 당시 소련 등 4개국의 외무장관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다.

제네바회의에는 북한의 외상 남일과 남한의 외무장관 변영태간의 회담이 진행되었다. 당시 남한 당국은 제네바회의에 참가를 거부했는데 미국측의 끈질긴 참가 요청에 따라 외무장관 변영태를 파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조정을 위한 제네바회의는 정전협정 60항에서 규정된 정치회의가 아니며, 앞서 지적한 4개국 외상들이 월남내전 종식문제 해결과 함께 한반도문제를 의제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제네바회의는 정전협정에서 요구한 직접적인 회의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북측 대표는 정전협정이 요구한 대로 제네바회의에서 조속한 시일내에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 철거를 주장하고 남북한 군대를 10만명 순으로 축소할 것으로 제의했다. 여기에 반해 남측 대표는 중공군은 유엔 감시하에 총선을 통한 통일정부를 수립함에 있어서 선거일 1개월 전에 철수를 할 것과 유엔군은 통일정부의 효과적 통치가 성취되고 유엔이 이를 인정하기 전에는 완전철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통일된 나라의 영토보존과 독립은 유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유엔군의 장기주둔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정전협정 60항에서 요구하고 있는 외국군 철군문제를 반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남한은 1953년 10월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이 방위조약에 근거하여 정전협정에서 규정된 조항들을 무시하고 군사력 증강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상호방위조약 4조에서는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 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라고 규제함으로서, 미군의 남한지역에 대한 장기주둔과 전력증강을 허용한 것으로서 정전협정의 규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은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감시기능을 무효화시킴으로서 정전협정이 요구하는 어떠한 규제와 장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어, 핵무기를 비롯한 유도탄 기지 설치 또는 병력과 신형무기 반입 등을 통해 군사력 증강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정전협정이 지켜질리 만무하고 따라서 정전협정 위반이라는 통계 숫자는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73년 현재 남측에서 주장하고 있는 북측의 정전협정 위반은 1만3천여건으로 보도된 바 있다. 이는 매일 두 건씩 북한측에서 위반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편, 북한은 `1974년 1월부터 8월까지 8개월간에 미국측이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북한을 반대하여 감행한 도발행위는 군사정전위원회에 정식 제기된 것만 하여도 무려 1만5천5백여건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유엔사령부에 속했던 모든 외국군대가 철수하게 되고 1975년 11월 유엔사 해체와 유엔 간판하에 있는 외군(미군)철수 결의안이 통과되자 한미간에는 새로운 군사동맹체제인 한미연합군사령부라는 것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군사동맹체제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연결되는 것이며 정전협정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전협정이 사실상 그 존재 의미가 없는 거와 같이 그에 따르는 정전상태도 불안정하며 한반도에서는 언제든지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3) 유엔사와 정전협정

유엔사령부는 1950년 7월7일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설치결정 되었는데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여 50년 7월24일 일본 동경에 사령부가 설치되고 그 사령부는 57년 7월1일 한국으로 이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엔의 결의에 의해 유엔사령부를 설치하게 된 근원은 미국이 해방후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 의한 임시정부수립이라는 한반도문제 해결의 국제적 약속을 계속 추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킴으로서 끝내는 미국의 조종하에 있는 유엔기구를 통해 자기들의 비위에 맞는 단독정부를 조작하고 그 단독정부가 유엔 결의에 의한 합법정부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문제를 유엔과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엔군사령관의 임무는 미 대통령의 대리자로서 미 합참으로부터 직접적인 전략지침을 받아 한반도 정전협정의 유지 및 이행과 관련된 임무만을 수행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평시에는 미 태평양 사령관의 작전 통제하에 있으며 주한 미군의 협조 및 지원을 요청할 수 있으며 전시에는 미국의 통수 및 군사지휘기구의 작전통제를 받으며, 미 태평양사령부의 협조와 지원 요청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엔사령관은 주한미군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다. 따라서 사령부라는 상부기구만 있지 6.25전쟁 당시와 휴전직후와 같은 자기의 직속 군사조직은 없는 상태이다. 그간 유엔사령부는 해체와 철수문제를 놓고 유엔 총회에서 몇 차에 걸치는 논의와 결의들이 있었으며 유엔사 해체와 철수라는 결의까지 채택된 바 있다.

1973년 가을 28차 유엔 총회에서 알제리를 비롯한 35개국 대표단의 공동결의안에서 유엔사 해체와 외국군 철거를 제기한 바 있으며, 74년 10월 29차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깃발 밑에 있는 모든 외국군대를 철거시키는 문제가 의제로 상정되었지만 미국의 조종하에 있는 나라들로 인해 채택되지는 못했다.

75년 8월 30차 유엔 총회에서는 비동맹 나라들과 평화애호 국가 그리고 사회주의 나라들이 중심이 되어 35개국 대표단의 공동결의안이 상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첫째 유엔군사령부 해체, 유엔 깃발 아래 있는 외국군 철거, 둘째 군사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 셋째 남과 북은 무력불행사를 담보하는 실제적 조치 강구 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결의안은 찬성 54, 반대 47, 기권 42, 불참 4로 가결되었다.

한편 서방측 결의도 상정되었는데 이 결의안 역시 가결되었다. 서방측 결의안은 정전협정의 직접적 당사자들이 정전협정의 모든 조항들을 계속 유효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는 데 동의하는 조건에서, 유엔사령부를 해체하며 유엔사령관을 대신하여 미군과 한국군대의 장교들로 하여금 정전협정의 이행을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유엔사령부가 더 이상 존속될 명분이 없기 때문에 그를 해체하는 대신 정전협정은 계속 존속시키며 그를 미군이 계속 관리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유엔사가 해체되더라도 한미방위조약에 의해 미군은 계속 주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엔 총회에서 가결된 결의안은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인해 결의안 통과에 대한 실효성은 거두지 못했으나, 유엔사령부나 또한 그 간판을 내세우고 있는 미군은 그 주둔 명분이 사실상 상실된 것과 같은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한미간에는 한미방위조약이라는 군사동맹체제에 걸맞는 한미연합사령부 체제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3. 정전상태에서 평화상태로의 전환 문제


1) 한.미측 제안

한미측은 휴전협정 체결후 50년대 60년대를 거치면서 휴전협정 60항에서 요구하고 있는 한반도 평화적 해결문제와 외군철수 문제에 관해 일체 관심을 돌리지 않았으며 한반도의 휴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구상과 제안들을 사실상 제시한 바가 별로 없다. 그것은 남한이 휴전협정 체결 자체를 반대하고 북한을 북진통일, 남한 주둔의 유엔 감시하에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노선과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되고 남북조절위원회가 개최되었으며 1973년 3월15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에서 북측 대표가 남북간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74년 1월1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제의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평화라는 어휘에 대한 개념에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평화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전제하고 `남북의 평화정착을 위해서 새로운 협정이 꼭 필요하다면 남북간의 상호불가침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는 북한의 평화협정은 위장된 협정이라고 하면서 남북간 불가침협정을 제의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장된 불가침협정은 쌍방이 절대로 무력 침공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고, 내정간섭을 하지 않고, 정전협정 효력의 존속 등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제의에 대해 북측에서는 `이는 북쪽이 주장한 평화협정을 반대하기 위한 술책에 하나이며 미군 주둔과 군사대치상태를 계속 유지해 보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남한군대의 통수권은 남한 당국자가 아니라 유엔군 사령관의 간판 하에 미군 사령관이라는 것. 따라서 남한 당국이 불가침협정을 맺자고 제의하는 것 그 자체가 가소로운 일이다`고 하면서 거부했다.
 
1979년 7월1일 당시 카터 미국 대통령은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의 공동성명 형식으로 남북간을 포함한 3자회담을 제의했다. 공동성명 제11항은 `박 대통령과 카터 대통령은...... 남북한 및 미국의 고위 당국대표회의 개최를 제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를 준비하기 위하여 양국 대통령은 한국 외무장관 및 미국 국무장관으로 하여금 적절한 방식으로 북한외상에게 이 뜻을 공동으로 전달하도록 지시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3자회담 제의에 대해 북한은 비현실적인 제안이라고 하면서 북한과 남한 사이에 해결할 문제가 따로 있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 풀어야 할 문제가 따로 있다고 하면서 남측이 주장한 3자회담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제를 섞어놓고 토의하자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거부 입장을 밝혔다.

1984년 1월10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당시 미국을 방문한 조자양 중국 총리에게 중국을 포함한 남북한 미국 등 4자회담의 개최를 제의했다. 그런데 조자양 총리의 미국방문은 북한이 제의한 바 있는 3자회담의 내용을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했는데 레이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3자회담보다는 4자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더욱 바람직한 방안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 4자회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보도된 바 없다.

당시 북한은 3자회담을 제안해 놓고 있는 상황이므로 4자회담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1996년 4월16일 한미정상회담(제주도)에서 남북한과 미.중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른다.(후술)

2) 북측 제안

휴전협정 체결후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국군 철수와 남북군 감군, 남북간의 불가침 선포 등을 주장해 왔는데 그를 연대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북미 평화협정

1973년까지는 남북 당국간에 무력불행사를 담보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했는데 74년 3월25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허담 외교부장은 보고를 통해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그는 보고를 통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이 정전협정의 체결 당사자이며 실질적인 당사자이므로 중국 인민지원군은 이미 오래전(1958년 10월)에 철수했으며 유엔군 역시 미군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면서 정전협정을 조인한 당사자인 미국과 직접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협정 체결의 내용은 다음 4가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첫째, 쌍방은 서로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함과 남북간의 7.4 공동성명에 따라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며, 내정불간섭.
둘째, 쌍방은 무력침공과 군비경쟁 중단, 경외로부터의 무기, 작전장비, 군수물자 반입 금지.
셋째, 유엔군 간판 제거와 조속한 기간내에 철거.
넷째, 외국군대 철거후 한반도에는 외국의 군사기지, 작전기지 불허용.
 
이러한 북미간 평화협정 제의는 80년대 초반까지 계속 되풀이 주장되어 왔다. 이때 주장된 평화협정은 전쟁종식과 관련된 그간 국제사회에서 경험한 바 있는 평화협정 또는 평화조약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다르며 주로 군사적 긴장을 완전히 해소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가 있다.

나) 3자회담

1984년 1월10일 북한의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연합회의에서는 미국 정부 및 국회 그리고 남한 당국에 3자회담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3자회담 내용은 북미간에는 정전협정을 대신할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남북간에는 불가침선언을 채택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 3자회담에서는 미국과 남한 당국이 제기하는 문제들도 토의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3자회담 내용을 당시 미국을 방문한 중국 조자양 총리를 통해 당시 레이건 미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는데, 레이건 대통령은 중국이 포함되지 않는 회담은 무의미하다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고 중국까지 포함하는 4자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북한이 3자회담 제의와 관련 북미간에 체결하는 평화협정에는 `조선전쟁의 종결을 법적으로 공식 선포하고 정전을 공고한 평화로 전환시키며 모든 외국군대를 철거시킬 데에 대한 문제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며, 불가침선언에는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여 무력행사를 하지 않으며 쌍방의 군대를 감축할 데 대한 문제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부언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3자회담에서 주장하고 있는 북미간의 평화협정은 6.25전쟁의 종결을 법적으로 공식 선포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그간에 주장된 대미 평화협정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하고 있다. 종래의 평화협정은 전쟁종식에 관한 법적 조치라는 내용이 한번도 포함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3자회담에 대해 당시 구 소련측과 일본의 경우는 매우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형편이었으며, 중국은 3자회담을 적극 지지하고 총리가 미 대통령에게 전달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3자회담보다는 당시 레이건이 주장했던 4자회담 쪽으로 정책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3) 남북 고위급회담과 기본합의서

80년대 중반부터 남북간에는 국회회담, 경제회담, 체육회담, 적십자회담, 종교인 교류, 예술단 교환공연 등등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지는 상황하에서 89년 9월18일 북한은 남북 총리회담 개최를 제의했다. 그리하여 남북 고위당국자회담 실현을 위한 예비회담이 개최되었으며 90년 9월5일 서울에서 제1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개최되었으며 91년 12월13일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합의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그 명칭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로 되어 있으며 1992년 2월19일 발효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본합의서에서는 제1장 남북화해 분야에서 제5조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제2장 남북불가침에서는 쌍방 무력불행사, 분쟁문제의 평화적 해결, 정전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을 불가침 경계선으로 할 것,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 운영, 남북 군사당군간의 직통전화 개설, 남북 군사분과위원회 구성과 불가침에 관한 이행 준수 대책 협의 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불가침에 대한 내용을 볼 때 그간 북한에서 제의한 바 있는 3자회담에서 지적되고 있는 북미간에는 평화협정을, 남북간에는 불가침선언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3자회담이라는 틀이 아니라 남북간에 불가침선언을 먼저 채택함으로서 3자회담에서 주장되고 있는 두 가지 내용중 한가지 문제가 해결된 셈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북미간에 평화협정 체결만이 남아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기본합의서 채택후부터 북한은 대미 평화협정을 계속 주장해 왔는데 이때의 평화협정 주장은 3자회담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틀속에서 대미 평화협정을 주장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본래의 3자회담은 먼저 북미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또한 남북간에는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순서가 남북한의 불가침선언을 먼저 체결하고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는 역순서로 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므로 북한은 남북 기본합의서가 채택된 후부터는 오늘날까지 3자회담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4) 4자회담

김영삼 대통령은 1996년 4월16일 제주도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공동발표문 형식으로 4자회담을 제의했다. 그 내용은, 첫째 항구적 평화협정으로 대치될 때까지 정전협정 유지, 둘째 한반도에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적극 협력, 셋째 남북한이 평화체제 구축의 주체, 넷째 전제조건 없는 북한대표와 만날 용의, 다섯째 남북한 중국, 미국간의 4자회담 제의 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제의의 4자회담에 대해 러시아와 일본측은 자기들이 배제된 데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었으며 중국은 그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북한의 경우 4자회담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보다는 앞서 지적한 바 있는 1996년 2월22일에 제의한 북미간의 잠정협정 체결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미국이 조선반도 문제를 진심으로 해결하려는 입장이라면 당사자도 아니고 책임도 없는 제3자를 끌어들이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방안에 나서야 할 것이다`고 4자회담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면서 4자회담에서 무엇을 해결하자는 것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설명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여기에 기초해서 4자회담에 대한 3자(남.북.미) 설명회가 열렸으며 이러한 설명회가 있은 후, 북한측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문제를 논의하자는 회담으로서 북한의 안보이익에 부합되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하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북한은 미국이 4자회담에서 미국과 중국의 역할을 위한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할 것과 3+1 형식의 회담을 제시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4자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 남.북.미간에 있었는데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4자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을 거쳐 1997년 8월5일 예비회담을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3차에 걸치는 예비회담을 거쳐 1997년 12월7일 제네바에서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결국 4자회담은 1999년 8월 제6차 회담까지 이어졌는데 별다른 합의를 못본채 끝나게 되었다. 99년 9월에 들어서면서 `페리 프로세스`가 발표됨으로서 4자회담 개최 명분은 사실상 없어지고 만 것이다.

여섯 차례에 걸친 4자회담에 북측은 정전협정의 기본적인 당사자가 북미인 만큼 평화협정 체결에서도 북미가 평화협정 체결에서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성 있게 주장했으며 미국측은 남측이 제의한 평화체제와 관련된 합의는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의 합의를 토대로 추진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측은 `조선반도 평화협정 초안` 형태로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것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전쟁상태의 종식선언, 불가침, 내정불간섭, 군사적 신뢰구축 및 군축 등 일반적으로 평화협정에 포함되는 상황들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후 한반도문제 해결에서 4자회담 문제가 일체 거론되지 않았으며 2000년 10월12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하여 발표된 공동코뮤니케에서 `쌍방은 한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한국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 하였다`라고 4자회담이 한반도문제 해결의 하나의 방도임을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이처럼 공동코뮤니케에서 4자회담 문제를 새삼 거론했다는 것은 본래 4자회담이 클린턴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의 회담에서 공동으로 발휘된 문제였으며 따라서 미국측 입장을 배려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4자회담만이 유일한 방도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함으로서 북한측이 줄곧 주장하고 있는 북미간의 평화협정 체결도 전쟁종식의 방도라는 점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가 있다. 이러한 4자회담 문제는 오늘날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남북한 및 중국에서도 거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4. 북미 평화협정과 불가침조약


북한은 2000년 6.15 공동선언 발표와 함께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 또한 국방장관 회담이 열리고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철길과 도로가 연결되는 등 남북간에 군사적 긴장 해소와 신뢰 분위기가 이루어짐으로서, 북미 평화협정 체결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이는 2000년 10월에 발표된 북미 공동코뮤니케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다가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출범함으로서 북미간에는 새로운 차원의 군사적 적대관계가 조성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세계적 규모에서의 패권적 군사전략 차원에서 전개된 새로운 국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6.25전쟁 종식을 위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해 부시 행정부에게 평화협정 제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매체들에 있어서는 한반도문제 해결의 원론적인 차원에서 간혹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보도한 바 있다. 오늘날 북한은 종래에 주장한 평화협정 대신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2002년 10월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북미간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의했다. 북한이 불가침조약 체결 제의를 하게 된 것은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적대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정책의 명분으로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으로 국제사회 여론을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부시 대통령은 집권전 대선공약의 하나로서 클린턴 대통령시대에 합의한 북미기본합의서를 파기하겠다는 것을 내세운 바 있으며 그에 대한 당위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라는 왜곡된 여론을 조성하고 기본합의서를 단계적으로 파기하는 조치를 강행한 것이다.    

물론 부시 행정부는 집권하자마자 6.15 공동선언 이행에 제동을 걸었으며 북한을 테러와의 전쟁의 대상국 또는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또한 핵선제공격 대상국의 하나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의 기초위에서 핵문제를 부각시킨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러한 북미간의 고조된 군사적 적대관계와 긴장국면을 해소하고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합리화시킨 핵문제에 관한 우려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서 불가침조약 체결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북한은 불가침조약 제의에 대해 `우리가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쏘겠다고 달려드는 미국에게 그 무엇을 해명해 줄 필요가 없으며 그럴 의무는 더욱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최대의 아량을 가지고 미국이 첫째로 우리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둘째로 불가침을 확약하며, 셋째로 우리의 경제발전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는 조건에서 이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 주었다`라고 하면서 `한반도에 조성된 엄중한 사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우리는 북미 사이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핵문제 해결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도로 된다고 인정한다. 미국이 불가침조약을 통해 우리에 대한 핵불사용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확약한다면 우리도 미국의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용의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불가침조약에 대해서 북한은 `나라들 사이에 서로 영토와 자주권을 존중하며 내정에 간섭하거나 침략하지 않으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을 확인하는` 조약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 행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불가침조약 체결 제의에 대해 거부 입장을 취했으나, 미 국내는 물론 국제 여론이 불가침조약 체결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조약이 아니라 문서로 보장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5. 전망


1953년 7월에 체결된 정전협정은 단순한 정전질서를 규제하고 그를 유지 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하기 위한 방도까지를 규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정전상태의 해결방식까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정전협정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정전협정 4조 60항에는 정전협정의 효력 발생후 3개월 내에 정치협상 회의를 개최하여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것을 규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전협정의 요구가 미국의 반대로 인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전협정 체결 당사자들 간에 정치회의를 개최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휴전후 북한과 한미는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여러 제안들을 한 바 있으나 서로의 이해관계와 문제해결의 견해 차이로 인해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반세기간에 걸쳐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방안과 조치들을 주장한 것은 한미측보다는 북한측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의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배라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하는 것보다는 정전상태를 지속화시킴으로서 미국은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합리화시킬 수 있고 그것이 또한 미국의 동북아를 비롯한 아태지역의 군사전략의 전개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항상 북한의 남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강조하면서 남한지역에 첨단무기와 작전장비 등을 계속 도입시키고 있다.

그러나 남북간에는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그를 실천하게 됨으로서 남북 사이에는 화해 협력을 통해 신뢰가 구축이 되고 특히 `우리는 하나다`라는 민족대단결이 상당한 수준으로 이룩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남북 사이에는 비록 군사분계선으로 분단되어 있지만은 군사적 충돌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오직 미국의 남한에 대한 군사적 지배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모두가 인식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문제는 `우리 민족 대 미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들을 전제할 때 남과 북 사이에는 이미 불가침선언에 합의한 바 있으며 북미간에 불가침조약만 체결이 되면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북미간의 불가침조약 내용에서 한국전쟁 종식 선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 주변 열강과의 새로운 안보의 틀을 구축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불안정한 정전상태가 확고하고 안전한 평화상태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2003년 3월14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통일연대 결성 2주년 기념 심포지움에서 강연한 원고입니다)


 

작성일:2020-10-13 10:09:30 112.160.110.45